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판토 해전 (문단 편집) == 의의 == 오스만-이슬람과의 충돌에서 기독교 군대가 거둔 결정적인 승리들 중 하나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론되는 해전이지만, 의외로 그 세계사적 파급효과는 미미했다. 세계사적 영향력은 고사하고 이슬람 세계나 기독교 세계, 지중해 세계 모두에 별다른 여파가 없다고 보아도 좋은데, 해전 자체는 베네치아와 스페인 연합군이 승리하였으나 베네치아는 [[키프로스]]를 되찾을 능력이 없었고 도리어 오스만의 강력한 육군에 [[달마티아]] 해안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더군다나 해군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가능한 키프로스나 크레타와 달리 달마티아는 오스만과 직접 국경을 맞닿아 있으니. 이후 베네치아는 스페인과 불협화음을 겪자 오스만과 강화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빠지면서 사실상 전쟁은 오스만의 승리로 끝났다. 강화조약 결과 베네치아는 달마티아 지방을 건사하는 조건으로 오스만에게 정식으로 키프로스를 할양했고 배상금 명목으로 30만 두캇을 지불했다. 스페인 또한 결과가 좋지 못했는데, 1574년 [[튀니스]]를 함락당하면서 북아프리카의 거점을 상실해버렸기 때문. 스페인 입장에서 레판토는 사실 이데올로기적 명분은 엄청나도 지정학적으로는 영 동떨어지고 이권도 별로 안 걸린 동지중해 그리스 앞바다에서 벌어진 충돌이었던 반면, 튀니스는 당장 지중해를 동서로 양분하는 위치에 있으며, 당시 스페인 왕실이 다스리던 땅으로 스페인과 지중해 세계 전반의 곡창지대였던 [[시칠리아]]에 바로 사략선단을 파견하여 그 일대 해상 무역과 연안 농업을 마비시킬만한 지정학적 요충지였으며, 그 이전에 [[하프스 왕조]]의 수도로서 나름 개발도 된 도시였다. 그 결과 해전 전보다 오히려 기독교 동맹은 세력이 줄어들어 버렸다. 실제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재상이자 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는 황제를 대신하여 제국을 운영해 나갔던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베네치아 대사 마르칸토니오 바르바로에게 "키프로스는 팔과 같고, 우리네 패전은 수염과 같다. 당신네들은 팔을 뽑혔으니 다시 자랄 리 없지만, 우리의 수염은 다시 풍성하게 자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이 경우에는 보여주기 식의 허세가 약간 섞였다고 봐야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당시 오스만 제국의 상황을 살펴보면,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레판토 해전 패배의 책임론에 휘말리고 있었다. 특히 부재상에 해당하는 인물로 레판토 해전에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해군 출신으로 부재상에 오른 최초의 인물일 정도로 오스만 해군의 거물이었던 피얄레 파샤는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에 대하여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는 평소부터 소콜루 파샤와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황제 셀림을 비판할 수는 없으니 재상이 책임을 지라고 요구한 것. 이에 소콜루 파샤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함대를 재건하겠다고 약속하는 등 레판토에서의 패전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며 단시일 내에 복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야 했는데, 베네치아 대사와의 회담에서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고 유추해볼 수 있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은 레판토 해전 패배 직후 [[튀니지]]를 탈환하였고, 해군의 규모 자체는[* 단 규모와는 별개로 오스만 해군의 질은 떨어졌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배는 뽑고 싶은대로 뽑아낼 수 있어도, 베테랑 해군은 뽑고 싶은대로 뽑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해군의 대다수가 전사한 상황에서 해군을 재건하는 것은 엄청난 시간이 걸리는 사업이다.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 혁명인데,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해군을 엿먹일 정도로 성장했던 프랑스해군이 혁명 이후 과도한 피바람으로 장교들이 대거 숙청 당하거나 망명을 해버렸기 때문에, 다시는 영국에 제해권 다툼을 못하게 되었다. 사실 혁명 이후 재건된 프랑스 함대의 규모는 영국에 크게 꿀리지 않았고 건함 기술력은 오히려 앞서기까지 했지만, 숙련된 장교단이 재건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과 해전만 붙으면 붙는 족족 프랑스는 깨졌고, 이후 청년학파의 득세까지 겹치며 결국 영국과의 건함경쟁에 프랑스는 완전히 탈락하고 독일 2제국으로 바톤이 넘어가게 된다.] 수복하여 체면치레를 했다. 레판토 해전의 의미는 이후 오스만에 [[암군]]들이 넘쳐나게 되면서 후대에 덧칠된 것이라고 봐야 한다.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대제국의 쇠퇴가 결정될 리 없음에도, 기독교 세계의 선전으로 마치 레판토 해전 패전 이후 오스만이 쇠퇴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려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며, 오스만 제국의 진정한 쇠퇴는 레판토 패전 후 무려 110년이나 지난 [[제2차 빈 공방전]](1683)의 실패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폴란드-리투아니아]]-[[베네치아 공화국]]-[[루스 차르국]]이 뭉친 '[[신성동맹]]'--시즌 투--과의 기나긴 전쟁을 치른 뒤부터 시작된다.[* 다만 '진정한 쇠퇴' 라는 말이 나와서 덧붙이자면, '그럼 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는 오스만이 짱먹었겠네?' 라고 생각하면 그것도 잘못. [[오스만 제국]] 항목을 읽어보면 알 수 있지만, 오스만 제국은 최전성기였던 [[쉴레이만 1세]] 시대부터 이미 정체의 조짐이 보였다. 오스만이 본격적으로 '유럽의 환자' 티를 내기 시작하는 것은 역시 2차 빈 공방전부터이고, 쉴레이만 이래로의 쇠퇴와 레판토 해전은 하등 관련이 없으므로 레판토에서의 패배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가 시작되었다는 말은 여전히 맞지 않는다.] 특히 젠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한테 개발살나면서 오스만의 쇠퇴는 제대로 가시화되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가 이토록 과대평가되는 이유는 그전까지 기독교 세력, 더 정확히는 [[서유럽]]이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그럴 듯한 승리를 거둔 역사가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에 이후 400여 년 간, 즉 현재까지 대반격을 가하여 위세를 회복한 그 시초로 레판토 해전을 꼽게 된 것이다. 1503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이 오스만 제국에 동지중해의 패권을 뺏긴 뒤 레판토 해전 후에 다시 기독교 세계가 제해권을 차지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경우가 많은데, 레판토 해전은 오스만 제국의 팽창을 막았을 뿐이지 제해권을 되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판토 해전의 영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레판토 이전, 1560년대까지 기독교 세계의 해군은 오스만 제국의 공세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으며, 당시 승천하는 기세였던 오스만 제국이 동지중해 패권을 넘어 과거 로마제국 처럼 지중해 전체를 자신들의 호수로 만들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이걸 막아내는 계기가 된 것이 레판토 해전임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레판토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이 승리했다면 이러한 추세는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게다가 레판토 해전 이전까지 베네치아와 스페인의 해군을 미친듯이 바르며 그야말로 무적, 무패의 위세를 자랑했던 오스만 해군이 레판토에서 격파되어, 반오스만 동맹군이 사기적으로 크게 고양되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이 전투에서 자신감을 얻은 [[합스부르크 제국]]은 [[오스만 헝가리]]를 침공하며 오스만과 20년 가까이 질질 끈 Long War라는 전쟁에 돌입한다. 물론 결과는 영 신통치 않았지만 슬슬 유럽이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중세 이후 유례없는 대해전이었던 레판토 해전의 타격으로[* 그것이 실질적인 피해였든 정신적인 것이었든.]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 전체를 지배하려는 방향에서 선회, 동지중해와 레반트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정도에서 만족했고 서지중해로 진출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비록 그 이후 점차 유럽세계의 중심이 지중해 연안에서 북해로 옮겨가기는 했지만, 지중해의 역사에서 레판토 해전의 의의를 그저 과소평가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이 외에도, [[키프로스]]의 상실과 해적의 증가, [[대항해시대|신항로]]에서의 본격적인 향신료 유입으로 인해 이탈리아 공화국 중 가장 마지막까지 세력을 유지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쇠퇴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상술한 것과 같이 오스만 제국의 확장 역시 정체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영국과 스페인과 같은 서유럽 열강들이 지중해의 주요 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